커피의 기원에 대해 최초로 고찰한 분은 17기 말 소르본느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안토니우스 파우스타라는 학자다. 그에 의하면 최초의 발견자는 아라비아반도 예멘 근처의 유목민이며, 양떼들이 어느 특정한 풀을 뜯어먹기만 하면 잠을 못 이루곤 하길래 그 풀에서 쓰디쓴 액체를 추출해낸 것이 커피의 시초라 했다.
당시 이슬람 성직자들은 심야기도 때문에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면 안되기 때문에 이 커피란 이름의 각성제는 도움이 아니 될 수가 없었다.
홍차의 기원도 커피 그것과 너무 유사하다. 8세기의 문헌인 육우의 에 보면 중국 운남성이 발상지로 스님들이 심야염불을 할 때 수마를(졸음) 쫓기 위해 역시 각성제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한다. 곧 커피는 이슬람교, 차는 불교라는 차이가 있을 뿐, 성직자들의 기도를 위한 각성제였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그 후 인류에게 있어 차의 효용은 제 2라운드에 접어든다.
사막지대에서 농사를 못 짓고 유제품만을 주로 먹고 사는 유목민들은 비타민제로서뿐만 아니라 영양유지에 필요불가결한 야채의 결핍을 차로써 메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몽고사람들은 하루종일 차만 마시고 산다.
몽고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티베트, 아라비아, 북아프리카 등 사막 유목지대에 차는 생활필수품으로 정착했다.
햇볕이 모자라 야채에 굶주린 영국에서도 차는 생활필수품으로, 그 소비량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1천 배나 된다.
소련에서 차를 ‘차이’라 하는데, 중국말 차이에가 몽고, 터기를 커쳐 러시아말로 정착된 것으로, 역시 소련은 야채가 결핍된 동구 여러 나라와 더불어 차문화권에 속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커피문화관과 차문화권으로 양대분하여 문화를 해석하려는 학자까지 생겨나고 있다. 그리하여 영국 같은 예외도 있긴 하나 차문화권은 대체로 소련, 중공을 비롯, 공산권이나 공산권에 동조하려는 정치권과 우연히도 일치돼 있다는 것이다.
일전 보도된 바로 소련은 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인도의 차를 매점매석함으로써 수요국인 영국의 차값을 무려 1백 50배나 등귀시키고 있다. 자기네들이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차가 생필품이 돼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적색권이나 예비적색권에 가공 수출함으로써 경제적으로 고삐를 꿰잡으려는 정치정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차 효용의 제 3라운드가 동서문제와 맥락되어 더럽게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1984. 2. 23)